지금 대한민국 TV는 '리얼의 홍수'에 휩쓸려 있다. '1박2일', '패밀리가 떴다', '무한 도전'을 대표주자로, 공중파의 주말 버라이어티는 물론이고, 케이블 방송까지 야외촬영물의 99%는 '리얼'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리얼 포맷'은 어떻게 진화된 것일까?

방송 프로그램 포맷의 진화는 장비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거, 'ENG'라고 부르는 포터블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방송 프로그램은 스튜디오 내부에서 진행됐다. 이동 가능한 카메라와 녹화 장비가 없는 상태에서 야외 촬영을 진행하려면, 방송사를 통째로 옮겨야 했던 시절이다. 부득이 야외 촬영이 필요한 경우에는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다. 초기 방송 프로그램 발전의 획기적인 전기는 이동 가능한 카메라인 'ENG'의 도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편집 부문에서의 획기적인 전기는 바로 1990년대 후반부터 대중화 되기 시작한 '넌리니어(non-liner)'라 부르는 비선형 편집기의 등장이었다. '넌리니어 편집기'는 쉽게 말해서, 컴퓨터 1대로 방송 편집이 가능한 시스템을 말한다. 테입에 담긴 촬영분을 디지털 포맷으로 변환시켜, 편집자가 순서에 상관없이 자유자재로 편집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워드 프로그램의 문서 작성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당신이 A4 한 장 분량의 문서를 작성했다고 치자. 그런데, 앞부분이 마음에 안들어 바꾸고 싶다면 커서를 옮겨 바꾸면 그만이다. 그런데, 직접 손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면? 한 글자 수정이라면 몰라도, 한 문장이나 문단이라면 다시 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방송 편집에서 '넌리니어(non-liner) 편집기'의 대중화는 곧 문서 작성 프로그램의 등장과 맞먹는 진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넌리니어 편집기'의 또 다른 장점은 정확한 짜집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치, 문서 작성시 수십개의 인터넷창을 열어 놓고, 필요한 부분만 '복사 & 붙여넣기'를 하듯이 수십, 수백개의 테입에 담긴 촬영 분량을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다.

'리얼 포맷'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적게는 10여 대, 많게는 2~30여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촬영된다. 따라서, 촬영 테입의 분량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이를 마치 손으로 문서를 작성하듯, 하나씩 보며 베껴내는 편집을 한 사람이 하면, 최소 몇 달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이다. 제작기간이 6개월에서 2년이 걸리는 다큐멘터리라면 몰라도, 주 단위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서 이같은 편집을 진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몰래카메라'와 '육아일기'로 대표되는 MBC '일요일 일요일밤에' 처럼, 막대한 인력과 장비, 제작비가 투자되는 방송사 대표 프로그램 1~2개만이 시도할 수 있는 포맷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로 접어 들면서 IT산업의 발전과 함께, 수억원을 호가하던 '넌리니어 편집기'가 수천만원대로 떨어졌고, 방송사들은 각 프로그램당 한 대씩의 '넌리니어 편집기'를 지급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이때부터, 동시에 수십대의 카메라가 돌아가는 포맷의 프로그램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가장 발빠르게 대처한 쪽은 KBS로, 초창기 '상상플러스'와 스타 동창회 포맷이었던 '해피투게더-프랜즈'가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과거를 더듬어 보면, 당시 스튜디오에 깔려있던 수많은 카메라가 기억 날 것이다.

다수의 카메라와 넌리니어 편집 시스템을 활용한 스튜디오 프로그램들이 성공을 거둔 이유는, 동시에, 모든 출연자들의 말과 행동, 표정까지 모조리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출연자들은 카메라가 자신을 잡아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냥 어디에서나 아무때나, 말을 내뱉고 움직여도 카메라에 잡히고, 방송에 나갔다. 이때부터, 미리 주어진 멘트 대신, 순간적인 '애드리브'와 '리액션'이 뛰어난 출연자들이 각광받기 시작했고, 그 선두주자가 바로 탁재훈과 신정환이었다.

과거에는 출연자가 아무리 재미있는 멘트를 날려도, 카메라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순간적으로 재미있는 '애드리브'이 떠올라도 자신에게 카메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서세원쇼'로 대표되는 토크쇼 를 기억해 보라. 출연자들은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제작 시스템이 미리 준비한 얘기가 아닌 '애드리브'를 따라가기 어려운 상황이다보니, 섣불리 '애드리브'를 구사할 수 없었다. 설령, 박장대소할 만한 '애드리브'나 '리액션'을 구사한다 해도, 카메라에 잡히지 않아서 그 효과가 반감되거나, 아예 편집에서 빠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넌리니어 편집기'가 촉발시킨 방송 포맷의 변화는 순간적인 '애드리브'와 '리액션'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고, 더불어, 탁재훈과 신정환과 같은 '재치있는 진행자'가 각광받는 시대가 열렸다.

이같은 변화는 진행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아무리 출연자가 많아도, 여기 저기에서 정신없이 멘트가 쏟아져도, 늘어난 카메라와 진보된 편집 시스템으로 재미있는 장면만 모을 수 있었으니, 프로그램의 흐름을 조율하고, 출연자들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1~2명의 진행자 보다, 캐릭터가 차별화된 다수의 진행자가 더 효과적이었다.  

KBS의 '넌리니어 편집'을 활용한 스튜디오 포맷이 큰 성공을 거두자, 다른 방송사들 역시 이를 도입하기 시작했고, 그리 오래지 않아 시청자들은 스튜디오 포맷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즈음 등장한 것이 바로 '무(모)한 도전'. '몰래 카메라'처럼, 야외에서 진행되는 '리얼 포맷'에 강점이 있던 MBC의 역습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모두들 알다시피, '야외 리얼'의 홍수. 그럼, 다음은?

당분간은 '야외 리얼의 시대'가 계속 될 것이다. 시청자들이 '야외 리얼'에 조금씩 싫증을 내는 상황이지만, 마땅히 대안이 없다. 다만, 조심스럽게 예측하자면, 변화의 단초는 HD포맷으로의 진화에 있다. 아직은 리얼 프로그램을 HD로 제작할 만한 기술적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으나, 그리 오래지 않아 HD로 제작된 '리얼 포맷'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추후, 방송 포맷의 진화는 뛰어난 화질과 16:9의 화면비율을, '리얼 포맷'에 어떤 방식으로 결합시킬 것인지가 관건이다. 누가 먼저, 어떤 방식으로 시작하느냐 역시 눈여겨 볼 대목이다. 현재, HD제작시 가장 많은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쪽은 KBS의 '1박 2일'. 전국 곳곳에 숨겨진 뛰어난 풍광이 HD로 방송될 때, 그 폭발력은 상상 이상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보다 2~3배의 제작비가 더 투자되야 하는 'HD 1박 2일'은 당분간 결행이 쉽지 않다. 따라서, 의외의 복병이 튀어 나올 수도 있다. 이래 저래 흥미로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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